"붉은방은 사창가에만 있는게 아니다"
'철컹 삐이~익' 철문이 열리고 머리에 씌워졌던 검은색 차양두건이 벗겨지는 순간
나는,
온통 붉은색의 작은방에 갇혀 있었다.
건장한 안기부(지금의보안사) 직원 두명에 의해 양팔이 묶이고 검은봉투가 머리에 씌워진체 어디론가 끌려가 풀어놓은 순간
처음 내눈에 들어온 광경 이었다
'죽여달라' 고 했다.
군의 간이의자에 벌거벗긴체 안쳐진 나는 고문관의 귀퉁박이 한방에 좌우 콘크리트 바닥으로 수십차례 나동그라졌다.
머리와 얼굴에는 온통 혹과멍 들로 욱신대고 눈은 부어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않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저항할수 있는것은 몇마디 욕설뿐 이었고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한터라 젖어있는 몸은 의자와함께 차가운 도끼다시(콘크리트를 갈아낸)
바닥에 내동댕이쳐 널부러지기 수십차례..
몇일을 밤낮으로 잠을 재우지 않고 강요된 자술서(?) 쓰기와 폭력으로 더이상 견디지못한 나의 육체와 정신상태 에서 터져나온 말 이었다
그림 제목은 '80년 5월-여기는 광주' 였다
당시 20대 후반으로 대학을 갖 졸업한 젊은화가였던 나는 '현대사의 비극'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사명감으로 그려낸 그림이었고 그렇게 전시했던 당일 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고문으로 피폐해진 나는 군법재판장 앉아 있었고 군복바지와 워커를 신은 내또래의 아주 젊은 판사는 이처럼 선고하고는 황급히 나가버렸다
이 상황은 한참 후에야 현실로 인식됬을뿐 그시각엔 멍하니 도망치듯 재판장을 빠져나가는 젊은판사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북한의 지령으로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 에 가담한 화가'를 처단한다는 사형선고 는 재판장의 허공을 돌아 돌아 내머리 속에 공명처럼 떠돌뿐이었다
"사형"
스물 아홉살 젊은이에게 국가는 죽음을 선고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함경북도출신으로 1.4후퇴때 공산당의 처단을 피해 남으로
피난한 부모의 자식 이라는 사실과 북한공작금을 수령했다는 그들의 판단과 VIP가 언급금지 단어인 '광주'를 언급했다는 죄목들 이었다
소아마비로 한쪽다리를 심하게 절고있던 청년으로
당시 전국을 최류탄가루에 휩싸놓은 군부독재를 반대하던 학생시위에
단한번도 참여하지도 못했지만
민족의 비극을 작가적 상상으로나마 기록하려고 했던(비상계엄당시 언론통제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진들은 통제되어 보도되지 못했다)
젊은 미술가의 그림한장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민중항쟁이 5년이나 지난 85년 에서도 엄중했으며 아예 역사에서도 지워지게 될것이라고 판단한듯 했다
만약,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국회앞에서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발빠른 대응으로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못했더라면..
우리들 누구도 이같은처지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한점 그림의 메세지 조차도 금지하는 서슬퍼런 절대권력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고 상상속에서만 있을수 있는 그런 상황도 절대로 아니다
2024년
21세기 우리들의 오늘에서도
이일은 현실이 되었을뻔한 사건 이었다
작가 /화가 박영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