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 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들에 앉아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 이재훈 『생물학적인 눈물』, (문학동네, 2021)
우리는 젊었을 때 좀 더 편해지려고 빚을 내서 큰집으로 옮기기도 하고
나를 알리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가진 것 다 털어내고 그 뿌리까지 뽑혀 빈 몸이 되고 나서야
떠오르는 태양보다도 저무는 해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텅 빈 들에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다닙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는 빈 들 저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온합니다.
빈 들에 앉아 빈속에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니 온몸이 뜨거워집니다.
하늘도 해를 비워내고 있습니다.
이제 빈 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인 박미산
박미산 시인은 2006년 『유심』 시 전문지로 등단한 후,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재등단했으며,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는 『루낭의 지도』,(2008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태양의 혀』,(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2020, 인천문화재단기금 수혜)가 있다
2014년 조지훈창작지원상 수상, 2022년 손곡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