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자연
조선후기 명문장가 박지원(朴趾源)이 쓴 연암집(燕岩集)에서 <경지에게 답함(答京之)> 편에 이런 문장이 있다.
"글의 정신과 의취가 이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만물에 두루 퍼져 있으니,
이 세상의 만물은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인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 이치를 내포한 온 세상의 만물은 아직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지만 않았을 뿐 저마다 훌륭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세상에 담겨져 있는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면 모두 독서라고 보는 사고인 것이다.
타성에 젖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하는 독서는 차라리 대자연과 벗하며 노는 것만도 못하지 않을까 한다.
옛날 상고시대에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하늘의 형상과 땅의 이치를 관찰하고 새와 짐승의 문양을 잘 살펴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이것이 주역의 시초이다. 복희씨의 자연에 대한 독법을 현대적으로 말하면 대상을 기호화하고 추상화한 것이라고나 할까.
공자도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를 남겼다. 아마도 주역의 원리를 사색하며 독서에 빠졌기에 그럴법한 고사가 생겼을 추측이 든다.
이 글은 경지(京之)라는 자를 쓰는 연암의 친구에게 주는 편지에 나온다. 경지라는 이는 성대중, 홍대용 등과 교유하기도 한 이한진(李漢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한진은 전서와 예서를 잘 쓰고 퉁소를 잘 불었다 한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문장의 근본 원리에 대한 담론이다. 이 글 뒤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사기의 문장만 보지 말고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비를 잡는 어린아이의 비유와 함께 실려 있다.
글을 좀 써 본 사람들, 특히 시인들은 연암의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이런 이치를 대개 스스로 깨우쳐 얻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시에서 구현하는 언어들이 아무래도 자연의 어휘들이 많은 까닭은 그 자연이 하나의 시이고 거룩하고 고결한 스승으로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구절을 읽지 말고 그 구절 이면에 있는 시인의 마음을, 시인의 마음보다 시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 즉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빛깔을 보아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닐까?
나아가 이 글을 단순히 문학으로 한정해서 읽는 사람은 독서를 깊이 하는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세상의 어떤 분야라도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자연과 세상에서 홀로 자득하며 신천지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때가 온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태산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현대의 건축가가 까치집이나 벌집에서 공학적인 깨달음을 얻고, 무술의 여러 권법이 동물들의 격투 자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다 그렇다.
또한, 스위스의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라는 사람이 사냥하다 자신의 옷에 붙은 도꼬마리에서 섬유부착포(찍찍이)를 고안해 성공한 것이나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 만델브로(Benoit B. mandelbrot)가 해안선에서 프랙탈 이론(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해 낸 것 등, 좋은 예들이 많다. 이런 것은 옛 문장 속의 조선시대 선비 사회를 그리며 오고가는 좀 고루한 나 보다는 현명한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요컨대 천권의 책을 읽으며, 천리의 길을 다니면서 자연을 사색하면 그런 세상에서 느끼는 풍부하고 훌륭한 장서와 스승은 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주변의 사물을 온통 스승과 책으로 만든 뒤에야 한 방면의 일가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그때의 삶이 얼마나 황홀할까?
글을 쓰고 읽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필자 프로필
서울 출생
영등포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경영학석사 (MBA)
조흥은행에서 근무
안세회계법인에서 근무